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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왜 벨기에의 식민지였던 곳은 네덜란드어가 아닌 프랑스어를 쓸까? - 콩고민주공화국을 중심으로

※콩고 민주 공화국과 벨기에의 역사를 다룬 이 게시물은 본격적으로 벨기에가 본격적으로 콩고탐사에 나선 1890년대부터

시작된 벨기에의 콩고 식민지화 초기의 역사를 다루므로 근대사로 분류하였습니다. 

 

 

 

<사실상 벨기에의 식민지나 다름없었던 콩고자유국>

 

벨기에의 식민지였던 콩고민주공화국은 프랑스어가 주로 사용되는 국가이다. 그런데 벨기에는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

소수의 독일어화자가 있는 국가인데 어떻게 프랑스어가 네덜란드어를 제치고 식민지인 콩고민주공화국에서 널리

쓰여지게 되었을까. 몇 가지 이유를 검토해보면,

 

1. 당시 벨기에의 부의 분포도를 보면 지금의 플란데르보다 왈롱이 더 잘사는 완전히 반대의 상황이었다.

 

https://slideplayer.com/slide/9086995/

<그림1. 1896년 벨기에 왕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 지도, GDP Per Capita>

 

19c만 하더라도 벨기에는 지금의 왈롱(불어권) 지역이 플란데르(화란어권) 지역보다 소득이 더 높았다.

현재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이는 이러한 소득의 격차는 프랑스어를 쓰는 왈롱인들의 '해외진출'에 원인이 되었다.

거창한 탐험이나 모험은 아니더라도, 당시 교통사정과 여가문화에 비추어 봤을 때, '여행 혹은 관광' 이라는 기본적인

개념 자체가 소수의 부유한 자들, 즉 재력이 있는 자들(Bourgeoisie)의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한계로 인해 상대적으로 산업에 있어 뒤떨어진 플란데르 지방보다 부유한 왈롱 지역의 자본계급들이 더 활발히

식민지 개척에 열중할 수 있었으리라 사료된다.

 

https://en.wikipedia.org/wiki/Communities,_regions_and_language_areas_of_Belgium

<빨간색이 왈롱, 노란색이 플란데르, 파란색은 독어권>

 

그렇다면 왜 왈롱 지방이 플란데르 지방보다 산업이 더 발달하여 부를 축척할 수 있었던 것일까.

다음의 지도에 몇 가지 이유가 있다.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Belgium_resources_1968.svg

<벨기에의 '석탄'자원 분포도, 왈롱과 플란데르의 경계선에 위치하나 대부분 왈롱 지방에 속해있다.>

 

현대 산업은 철과 석탄 자원의 힘에 발전된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 지도에서도 명백하게 보여주듯

그러한 산업시대의 필수자원들, 석탄과 철 등이 왈롱 지방에 더 풍부히 매장되어 왈롱 지방의 산업 발전에 기여한 것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File:Ougr%C3%A9e_Cokerie.jpg

 

<벨기에의 대표적인 산업지대, Liège주의 산업단지>

 

 

<1860년 왈롱 지방에서 설립된 벨기에의 유구한 역사의 광업회사, 까흐뫼즈 사>

 

 

<1817년 마찬가지로 왈롱에서 설립된 철강회사, 콕커릴&상브르 사, 이 회사들은 산업혁명 시기부터

존재했던 기업들이다.>

 

https://www.flickr.com/photos/156291315@N03/39371185385

<왈롱 지방의 대표 철강기업이자 벨기에 유수의 기업이었던 COCKERILL&SAMBRE 사의 제철소,

그러나 지금은 회사가 파산하면서 화려했던 영광은 플란데르의 기업들에게 넘어가게되었다.>

 

https://www.bcd-urbex.com/blue-power-plant-belgium/

<파산한 C&S사의 제철소 내부, 바로 이것이 쇠락한 왈롱 지방의 현주소이다.>

 

<표1. 왈롱과 플란데르의 산업분야별 종사인구, 왈롱과 플란데르의 산업격차, 갈색이 플란데르, 노란색이 왈롱 지방.

1896년 왈롱 지방의 2,3차 산업 종사 인구는 에노Hainaut 주와 리에주 주 등 다른 왈롱 지방과 비교해도

월등한 수를 자랑하였으나 1961년을 보면 플란데르의 동서 Flanders 주와 앤트워프가 급 성장한 것을 볼 수 있다. >

 

이렇듯 부유했던 왈롱과 플란데르의 관계가 완전히 역전되기 전까진 왈롱 지방이 벨기에의 경제를 이끄는 심장부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산업의 힘으로 부를 쌓은 벨기에의 왈롱 부르주아들은 막대한 비용이 드는 식민사업에 뛰어들게 된 것이다.

 

2. 당시 벨기에의 국어는 오직 Lingua Franca, 프랑스어였다.

 

 

<1900년대 당시 벨기에의 국왕, 레오폴드 2세. 콩고에서의 끔찍한 학살로도 널리 알려진 이 왕의 모국어는 프랑스어였다.>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Proclamation_on_the_founding_of_the_Belgian_Congo.JPG

<프랑스어로 작성된 1908년 벨기에의 콩고 자유국 합병 문서, 이전까지의 콩고는 그 유명한 '레오폴드 2세의 사유지'였다>

그런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의 후원을 받은 영국인 모험가 헨리 모건 스탠리, 그는 영어를 쓰는 영국인이었지만 그가 콩고강을 따라 탐험한 영토는 모두 벨기에 국왕의 권리 하에 놓이게 됨으로써 콩고가 벨기에의 식민지가 된 것이다.

그의 탐험의 거점이 된 지금의 콩고민주공화국의 수도 킨샤샤는 더군다나 당시 국왕인 레오폴드의 이름을 딴 '레오폴드'빌로 명명되었다.

 

프랑스어가 근세와 근대의 유럽 각국의 왕족을 비롯한 상류층의 사교언어, 귀족언어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벨기에로 식민지 개척을 떠난 부유한 부르주아들과 식민지 경영을 위해 도착한 공무원과 같은 행정가 벨기에인들도 

모두 프랑스어를 의무적으로 사용해야만 했다.

 

https://en.wikipedia.org/wiki/Francis_Dhanis

<벨기에령 콩고 식민지의 행정공무원이자 군인이었던, Francis Dhanis, 대표적인 벨지안 콩고 원정대 중 한명이었다.>

 

플란데르의 네덜란드어는 사실상 대중언어로써의 취급을 받았으며, 독립 이후에도 벨기에의 국어는

오직 프랑스어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식민지에 파견된 '벨기에 군대'의 언어도 프랑스어였다.1)

 

https://en.wikipedia.org/wiki/File:Intocht-tabora-19-september-1916.jpg

<콩고의 벨기에군>

 

이렇게 네덜란드어는 소위 '하위계급의 언어' 취급을 받는 지경이었으니 프랑스어가 자연스럽게 벨기에의 식민지들에

침투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플란데르의 네덜란드어가 지금과 같이 벨기에의 공용어로써의 위치를 확고히 하게 된 것은 플란데르 인들을 중심으로한

독립 이후 1세기 동안 진행된 투쟁의 결과였다.

 

3. 벨기에인들은 그들이 '정복'한 식민지인들에게 '프랑스어'만 쓰도록 가르쳐야할지, 아니면

'프랑스어+네덜란드어'를 병행교육해야할지에 대해 논쟁했다.

 

https://en.wikipedia.org/wiki/File:Students_in_theTeaching_laboratory,_Medical_School,_Yakusu_Wellcome_L0039121.jpg

<자신들의 언어가 아닌 외세, 벨기에 왈롱인의 프랑스어로 교육받는 콩고의 학생들>

 

미국 West Georgia College의 역사 교수인 Newt Gingrich의 논문에 따르면, 당시 콩고의 벨기에인들 사이에서 이러한 '언어교육'에 관한 논쟁이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정복한 콩고에서 어린이들을 프랑스어로만 교육시켜야할지, 아니면 네덜란드(플란데르)어와 프랑스어를

병행교육시켜야할지 논쟁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힘과 권력, 자본을 가지고 있던 왈롱 출신의 불어화자들의 의견이 우세했고, 결국 벨기에 치하 콩고의

교육은 '프랑스어'로만 진행되었다. 2)

 

https://en.wikipedia.org/wiki/Patrice_Lumumba

 

<프랑스어로 교육받은 엘리트이자 콩고민주공화국 초대 총리, Patrice Lumumba. 완전히 고착된 프랑스어 단독 사용으로 프랑스어로만 교육받고 자란 콩고의 청년들이 훗날 독립을 이끌고, 마침내 독립을 달성하였으나 정부의 주요 인사가 된 후에도 프랑스어를 자국의 공용어로 지정하게 된 것이다.>

 

3줄 요약:

 

1. 프랑스어는 19세기까지 벨기에 뿐 아니라 유럽 각국 왕족, 귀족, 부르주아 등 식민지 개척에 뛰어들 만한 부와 능력을 가진 상위계급의 언어였다.

 

2. 벨기에의 식민지(콩고 및 루안다-우룬디)들에 파견된 식민지 관리를 위한 행정공무원과 군대는 모두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3. 벨기에령 식민지의 언어교육은 초기의 플란데르계 벨기에인과 왈롱계 벨기에인 간의 알력다툼에서 힘과 지위가

월등했던 왈롱계인이 승리함에따라 프랑스어로만 이루어지게 되었다.

 

1)

See G. Geerts (1988) "Language Legislation in Belgium and the Balance of Power in Walloon-Flemish Relationships in Language Attitudes in the Dutch Language Area (R. Van Hout & U. Knoops, eds)

'Altough the Southern Netherlands had never been unilingual, the only official language at the birth of the Kingdom of Belgium was French. The unilingual French speaking provisional government obviously took it for granted that the majority of Belgians spoke French. Thus French was to become the language of administration and the army.

 

2)

"Belgian Education Policy in the Congo: 1945-1960" by Newt Gingrich, 1971

http://www.asaninst.org/wp-content/cache/essay2017/newt-gingrich-dissertation-congo

There's a section in Gingrich's dissertation on the debate over bilingual education that took place in the halls of the colonial administration in Brussels. By "bilingual," of course, the Belgian bureaucrats and politicians were arguing over whether Congolese children should be instructed in both French and Flemish, or just in French.

 

참고자료: 1.

"왜 구 벨기에 식민지들은 네덜란드어대신 프랑스어를 쓸까?

Why do former Belgian colonies speak French instead of Dutch?"

https://www.reddit.com/r/AskHistorians/comments/1lisgj/why_do_former_belgian_colonies_speak_french/

 

참고자료: 2.

벨기에에서 사용되는 언어 상태(백 마리죠:한국외대 교수·불어학, 벨기에 인, 1987)

https://www.korean.go.kr/nkview/nklife/1987_1/8_14.html

 

그림1, 표1

Reversal of Fortune in a Small, Open Economy: Regional GDP in Belgium, 1896-2000 Erik Buyst, 2009